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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제의 오만한 서한과 21세기 반도체 장벽의 역설

건륭제의 오만한 서한과 21세기 반도체 장벽의 역설

요약

1793년, 영국 사절단의 교역 요청을 단칼에 거절하며 "천조(天朝)에는 부족한 물산이 없다"고 호령했던 청나라 건륭제의 쇄국 선언은 오만과 무지의 상징으로 꼽힌다. 최근 미국이 주도하는 거대한 반도체 제재망 앞에서 중국이 '자력갱생(自力更生)'을 외치며 독자적인 기술 생태계를 구축하려는 모습을 보며, 많은 이들이 21세기에 부활한 건륭제의 붉은 요새를 떠올린다. 하지만 복잡한 국제 정치의 이면을 차가운 논리로 들여다보면, 지금의 상황을 건륭제의 쇄국에 단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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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9월 24일(현지시각) 워싱턴D.C. 백악관에서 국빈 만찬을 위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맞이하며 대화하고 있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9월 24일(현지시각) 워싱턴D.C. 백악관에서 국빈 만찬을 위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맞이하며 대화하고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1793년, 영국 사절단의 교역 요청을 단칼에 거절하며 "천조(天朝)에는 부족한 물산이 없다"고 호령했던 청나라 건륭제의 쇄국 선언은 오만과 무지의 상징으로 꼽힌다. 최근 미국이 주도하는 거대한 반도체 제재망 앞에서 중국이 '자력갱생(自力更生)'을 외치며 독자적인 기술 생태계를 구축하려는 모습을 보며, 많은 이들이 21세기에 부활한 건륭제의 붉은 요새를 떠올린다. 하지만 복잡한 국제 정치의 이면을 차가운 논리로 들여다보면, 지금의 상황을 건륭제의 쇄국에 단순 빗대는 것은 다소 게으른 비유일지도 모른다.

과거의 청나라가 중화사상이라는 오만에 취해 스스로 빗장을 걸어 잠갔다면, 지금의 중국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자력갱생의 길로 내몰린 '불가항력'의 상태에 가깝기 때문이다. 세계의 공장을 자처하며 글로벌 공급망의 단물을 흡수하던 중국을 21세기의 만리장성 안으로 억지로 밀어내고 있는 주체는 다름 아닌 미국이다. 국가 안보라는 명분 아래 수출 통제와 디리스킹(De-risking)의 장벽을 높게 쌓아 올리며 중국에 제재를 강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술과 공급망 자립을 외치는 것은 제국의 오만이 아닌 일종의 생존 본능의 방편으로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흥미로운 역사의 아이러니를 목도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무역과 세계화를 전도하며 '팍스 아메리카나'를 구가하던 제국 미국이, 이제는 오히려 관세 폭탄을 무기로 스스로 외국과의 무역 장벽을 높게 쌓고 있는 장면이다. 반면 서방의 견제와 규제에 갇힌 중국은 반도체 자립을 꾀하는 동시에, 희토류 등 자원을 무기화 하면서, 전기차와 태양광, 배터리 등 새로운 산업을 무기로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를 포함한 해외 진출을 공격적으로 가속화하고 있다. 즉, 21세기의 새로운 쇄국을 향해 국제 질서의 틀을 짜 맞추고 있는 것은 중국이 아니라, 자국 우선주의에 빠져 자유무역의 룰을 부수고 있는 것은 미국일지도 모른다는 서늘한 역설이다.

AD 그렇다면 생존을 위해 홀로서기를 선택한 중국의 기술 자력갱생은 어떤 미래를 전망하고 있을 것인가. 먼저 중국의 입장에서 긍정적인 시나리오를 그려볼 수 있다. 미국의 가혹한 제재는 오히려 중국의 기술 굴기를 앞당기는 '스푸트니크 모멘트'로 작용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14억 명이라는 막대한 내수 시장의 데이터, 쏟아지는 국가 자본, 그리고 희토류 등 압도적인 자원 통제력이 결합하면, 서방의 간섭 없이도 완벽하게 작동하는 독자적인 '붉은 기술 생태계'가 완성될 수 있다. 이미 우주 탐사와 전기차 시장에서 서방의 자동차 제국들을 위협하고 있는 중국의 행보는, 이 거대한 강제적 자립 프로젝트가 결코 허황된 꿈만은 아님을 증명한다.

그러나 고립된 생태계는 아무리 거대할지라도 필연적인 그림자를 수반한다. 바로 '기술 갈라파고스'의 늪이라는 부정적 시나리오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일본이 겪었던 뼈아픈 실패가 이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정밀함을 자랑했던 일본의 IT와 휴대전화 산업은, 글로벌 표준과 교류하지 않고 오직 자국 내수 시장의 입맛에만 맞추어 진화하다 결국 스마트폰이라는 외부의 충격에 속수무책으로 멸종해 버렸다. 외부의 피가 섞이지 않는 폐쇄된 혁신은 서서히 늙어갈 수밖에 없다.

중국의 기술 자력갱생 역시 아무리 불가항력적인 선택이었다 한들, 이 갈라파고스의 저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반도체와 AI 산업은 전 세계 천재들의 두뇌와 국경을 초월한 자본이 거미줄처럼 얽힌 극단적인 글로벌 분업의 산물이다. 제재를 피해 나 홀로 모든 공급망을 대체하겠다는 것은 막대한 비효율을 낳을 뿐만 아니라, 글로벌 스탠더드와 단절된 중국만의 값비싼 내수용 제품으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

결국 미·중 기술 패권 전쟁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기 어려운, 상호 공멸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는 소모전이다. 패권 유지를 위해 스스로 자유무역의 빗장을 걸어 잠그는 아메리카와, 살기 위해 거대한 갈라파고스 섬을 개척해야만 하는 중국. 두 거대 제국이 빚어내는 이 맹목적인 분절(分節)의 질주 속에서, 우리는 파편화된 세계가 청구할 막대한 청구서를 불안하게 기다리고 있다. 과연 21세기의 갈라파고스에 갇히는 것은 누구인가. 안타깝게도 그 섬에는 절대 승자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는 않은 듯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부산포커스에도 실립니다.


#쇄국정책#건륭제#자력갱생#기술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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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동양사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마쳤다. 중국사 연구와 역사지도 편찬을 통해 시공간에 걸친 역사 연구를 진행했다. 또한 근래에 재난인문학 연구에 종사했으며, AI를 비롯한 미래 사회의 변화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저술로는 '재난인문학'이 있고, '감염병의 중국사', '일본 지진재해사', '중국의 역사-송대' 등을 번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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