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약
우리 집 옷장에는 주인장의 미련이 먼지처럼 달라붙은 옷들이 많다. 언젠가 입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가 몇 년의 세월을 버티게 한다. 결국 헌 옷 수거함으로 향할 운명일지라도 선뜻 손을 떼지 못하는 건, 그 옷에 깃든 특별한 추억이나 비싸게 샀다는 매몰 비용의 오류 때문이다. 인간은 이처럼 사소한 물건 하나에도 감정적 의미를 부여하며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여긴다. 그러나 오늘, 나는 다른 종류의 소유를 생각했다. 한 번 맺은 인연을 옷장 속 낡은 옷처럼 먼…
본문
우리 집 옷장에는 주인장의 미련이 먼지처럼 달라붙은 옷들이 많다. 언젠가 입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가 몇 년의 세월을 버티게 한다. 결국 헌 옷 수거함으로 향할 운명일지라도 선뜻 손을 떼지 못하는 건, 그 옷에 깃든 특별한 추억이나 비싸게 샀다는 매몰 비용의 오류 때문이다. 인간은 이처럼 사소한 물건 하나에도 감정적 의미를 부여하며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여긴다.
그러나 오늘, 나는 다른 종류의 소유를 생각했다. 한 번 맺은 인연을 옷장 속 낡은 옷처럼 먼지 속에 방치하지 않겠다는 다짐. 오히려 꺼내고 또 꺼내어 새 옷처럼 빛나게 하겠다는 결심. 그 결심이 오늘 하루를 움직이는 동력이 되었다.
25일 토요일 아침, 창밖은 기분 좋게 화창했다. 며칠간 기상 예보를 살피며 가졌던 아리송한 의구심은 눈앞의 맑음 앞에서 비로소 확신으로 바뀌었다.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학교로 향하는 길, 차가운 아침 공기가 정신을 맑게 깨운다. 40여 분의 라이딩 동안 머릿속에는 오늘의 풍경이 한 편의 영화처럼 상영된다.
행사장 시설물을 점검하고, 귀빈들을 맞이할 포스터를 띄우고, 1년간 묵혀두었던 등산화의 먼지를 털어낸다. 귀빈들과 주고 받을 명함을 두둑이 챙긴다. 단순히 행사를 치르는 것이 아니다. 산행 중에 로봇 산업의 리더들과 나눌 '서울로봇고의 상생 설계도'를 마음속으로 되새긴다. 나는 이것을 '계획된 우연'이라 부른다. 준비된 마음만이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운명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15년의 발자국, 대모산 정상에서 마주한 로봇의 봄
AD 내가 서울로봇고 공모 교장으로 부임하고 지난 2년, 얄궂게도 로봇인 등산대회 날이면 보슬비가 내렸다. 대모산 정상 대신 둘레길을 걷거나 로봇관(체육관)에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관련기사: 보슬비가 가로막아도 대모산에 '로봇인'이 모이는 이유 https://omn.kr/2ho5i)
하지만 15회를 맞이한 오늘은 달랐다. 15년이라는 세월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고 팬데믹의 터널을 지나면서도 로봇 산업 종사자들이 서울로봇고에 모여 정보를 나누고 연결했다는 것, 그 지속성 자체가 이 산업의 뿌리 깊음을 증명한다.
우리 로봇 산업의 밝은 미래를 축복하듯 쾌청한 날씨가 280여 명의 로봇인들을 반겼다. 한국AI로봇산업협회 관계자들의 들뜬 얼굴에서 오늘 행사의 열기를 넘어 산업의 활기를 읽는다.
로봇관에서 열린 개회식에서 나는 두 가지를 강조했다. 하나는 우리 로봇 산업이 이룩한 눈부신 성취에 대한 경의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렇게 직접 청했다.
"기술은 도구일 뿐입니다. 결국 그 도구를 휘두르는 것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우리 학생들을 문제 해결력이 충만한 인성 바른 로봇인으로 키우기 위해, 현장의 지혜를 나눠주십시오."
짧은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34년 교직이 응축돼 있었다. 기술을 가르치는 학교가 결국 사람을 길러야 한다는 믿음.
경품의 행운보다 값진 연대의 약속
산행 후 풍성한 식사가 이어졌다. 식사 후 삼삼오오 모여 뭔가를 기다리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어질 경품 추첨을 기다리는 기대가 화사하게 피어올랐다. 경품 추첨은 등산대회의 꽃이다. 130여 개의 경품 당첨자를 호명하는 동안 자리를 비워 기회를 놓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당첨 가능성과 경품의 질이 좋다는 소문이 15년간 쌓였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행운을 거머쥐고 환호하며, 누군가는 아쉬운 입맛을 다신다. 나 역시 귀를 쫑긋 세워보았으나 행운의 여신은 늘 그렇듯 나를 비껴갔다. 하지만 실망하지 않는다. 학교장으로서 기업 대표들과 눈을 맞추고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었던 시간 자체가 나에게는 가장 큰 경품이었기 때문이다.
행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이들을 교문에서 배웅했다. 우리 학교 학생 채용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약속, 회사를 방문해 달라는 제안, 그리고 묵묵히 전해지는 따뜻한 악수들이 가슴에 남았다.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깊이 기원했다. 귀가하는 길에 우리 서울로봇고 학생들이 보여준 열정과 선생님들의 정성, 그리고 학교가 드리는 따뜻한 온기를 가득 품고 가시기를.
로봇이라는 차가운 금속을 다루는 이들이지만, 그들의 마음속에 담긴 우리 아이들에 대한 기억만큼은 금속의 질감을 넘어 인간의 온기로 가득하기를 바랐다.
명함 한 장, 또박또박 복기하다
교장실로 돌아와 바로 퇴근하는 대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오늘 받은 명함들을 책상 위에 한 장씩 펼쳐놓았다. 올해부터 한국AI로봇산업협회를 이끄시는 회장, 산업통상부 산업성장실 산업인공지능정책관, 멀리 대구에서 올라오신 신임 한국로봇산업진흥원 원장, 중견 로봇 제조사 대표, 자동화 솔루션 스타트업 대표, 대학교 교수, 강남구청 로봇인공지능팀장, 서울시교육청 장학관... 명함 한 장 한 장이 오늘 나눈 대화의 온도를 담고 있었다.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한 분 한 분과 나눈 대화를 복기하며 정성을 다해 메일을 보냈다. '채용 논의를 구체화하고 싶습니다', '방문 일정을 잡겠습니다', '오늘 말씀해 주신 현장의 조언을 교육과정에 녹여보겠습니다'. 오늘의 만남을 그저 흘러가는 바람으로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함은 종이 한 장이지만, 그 위에 새겨진 이름들은 서울로봇고라는 이름을 그들의 마음에 깊이 각인시키는 징검다리가 되어줄 것이다.
아침 옷장 앞에서 떠올린 미련과 달리, 오늘 받은 명함들은 서랍 속에 묻어두지 않겠다. 꺼내고 또 꺼내어, 우리 아이들이 세상으로 나가는 문을 하나씩 두드리는 데 쓸 것이다. 이 작은 노력이 매일 땀 흘리며 실력을 쌓는 우리 아이들이 세상으로 나가는 든든한 디딤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기술을 배우는 아이들이 '기능'에만 매몰되지 않고, 타인의 삶을 지탱하는 '시민'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 그것이 내가 34년째 교직에서 꾸는 변하지 않는 꿈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블로그에도 실립니다.
#로봇인#등산대회#서울로봇고#한국AI로봇산업협회#로봇인등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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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탈자 신고 네이버 채널구독 다음 채널구독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10만인클럽 10만인클럽 회원글 오성훈 (garachim67) 내방
서울로봇고등학교 교장. 『되풀이되는 비극, 따개비 현장실습』, 『디지털 대전환 시대 직업계고 미래는』 등 직업계고 학생들의 삶과 미래를 응원하는 글을 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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