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약
어두운 상영관엔 빈 자리가 찬 자리보다 훨씬 더 많았다. 내가 앉은 열에는 오로지 나 혼자 뿐이었다. 추천사 화려하게 나붙은 동시간대 다른 작품들을 밀어두고 이 영화를 택한 것이 잘못된 선택이었을까, 조금은 우려가 됐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내 직감은 바로 이 영화라고, 훔볼트의 이름이 나붙은 작품을 이대로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오른 뒤 박수를 쳤다. 어떤 감정이며 감각이 떠돌고 있는지 모를 무거운 적막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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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상영관엔 빈 자리가 찬 자리보다 훨씬 더 많았다. 내가 앉은 열에는 오로지 나 혼자 뿐이었다. 추천사 화려하게 나붙은 동시간대 다른 작품들을 밀어두고 이 영화를 택한 것이 잘못된 선택이었을까, 조금은 우려가 됐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내 직감은 바로 이 영화라고, 훔볼트의 이름이 나붙은 작품을 이대로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오른 뒤 박수를 쳤다. 어떤 감정이며 감각이 떠돌고 있는지 모를 무거운 적막 가운데서 더없이 큰 동작으로 힘껏 손바닥을 맞부딪쳤다. 지금껏 여러 영화제, 박수가 응원이며 지지이자 예의인 많은 행사들을 다녔음에도 내가 가장 앞질러 박수를 친 것은 이 영화가 처음이었다.
상영관을 걸어 나오며 영화가 내게 안긴 여운을 더듬는데,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서 프로그래머로 일하는 친구 하나가 어깨를 쳤다. 두서없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가 내가 본 영화가 무엇이냐고 물어왔다. 나는 <훔볼트 USA>라 답했다. 영화제에 걸린 꽤 많은 작품을 보았다는 그가 이 영화만큼은 아직 보지 못했다며 예매도 얼마 차지 않았다고 말했다. 나는 이 영화가 아주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라고, 적어도 요 몇 년 본 작품 가운데 가장 탁월한 작품일지도 모르겠다고 답하였다. <훔볼트 USA>가 내게 남긴 감흥이 정말로 그러했다.
탁월한 지성과 미국의 만남
<훔볼트 USA>는 제18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프론티어 섹션 상영작이다. 전 세계 다큐 신작을 대상으로 한 섹션으로, '프론티어'란 명명에서 알 수 있듯 안주하지 않는 작품, 각별히 매체의 형식이며 가능성에서의 나아감을 모색하는 영화에 주목하는 부문이다. 올해는 <훔볼트 USA>를 포함하여 모두 8편이 선정됐는데, 영화제 측은 "선정작들은 그들 각자가 다루는 주제만큼이나 형식의 독창성에 주목하게 만든다"며 "선정의 방향에는 내용과 입장, 문화적, 예술적, 정치적 질문이 오직 예술적 형식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더 큰 의미를 얻는다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어떤 영화인가.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선 반드시 알렉산더 폰 훔볼트를 말해야만 한다. 내게 그는 저 알렉산드로스 대왕보다 위대한 단 두 명의 알렉산더 중 하나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독보적인 야망과 결단력으로 당대 가장 넓은 영지를 정복한 정복자였다면, 훔볼트는 편견 없는 이성과 세상을 이해하려는 열망, 그리고 언제나 진실에 다가서는 용기로써 당대의 미지를 정복한 정복자였다. 당대를 대표하는 탐험가이자 과학자, 사상가였던 훔볼트의 이름은 그 넓은 너른 업적의 결과로써 해류부터 동식물과 광물, 건물과 도로, 행정구역 등에까지 곳곳에 붙어 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 G. 앤서니 스바텍의 탁월한 다큐멘터리 영화 또한 그 이름을 붙였다.
훔볼트의 이름 뒤에 미국을 뜻하는 'USA'가 붙은 것이 이색적이다. 훔볼트는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프로이센 왕국에서 활동했다. 그 파란만장한 생애 가운데 미국은 말년 약 6주 동안 단 한 차례 방문한 게 고작이다. 그러나 그 파급이 결코 작지는 않았던 모양으로, 토마스 제퍼슨 미국 대통령이 당대 명사였던 훔볼트를 백악관에 초청해 대담을 나누는 등의 일화가 세상에 알려져 있다.
당대 지성의 세계를 확장해 나가던 선도적 학자와 막 첫 발을 뗀 역량 있는 국가가 6주 동안 만났다. 그 만남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훔볼트 USA>가 담고 있는 것이 이와 떨어져 있지 않다.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미국 뉴욕에서 활동해온 G. 앤서니 스바텍이 훔볼트와 미국을 잇는 영화를 기획해 제작한 건 어쩌면 저의 뿌리와 줄기가 호응하여 열매를 맺고자 하는 자연스런 관심이었을까.
'오디세이' 만큼 정밀하고, '호프' 만큼 괴랄한
어떻게 표현하는 게 좋을까. 이 영화가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 상당히 도전적이며 혁신적으로 다가와서 나는 쉽게 그를 정리해 말하기 어렵다. 한참을 머물러 생각한 끝에 나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오디세이>만큼 정밀하고 <호프>만큼 괴랄하며 <브라이드!>처럼 열정적이고 <햄넷>만큼 다루는 대상에 경의를 표하는 작품이다. 그저 편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해낼 수 있는 최선, 최상의 것을 담기 위해 확장한 시도가 놀랍다. 담고 있는 담론 뿐 아니라 영상과 사운드 또한 안정적이고 때로 도전적이다. 이 모두가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 훔볼트의 연결성에 대한 사상으로 발화한단 건 경이적이기까지 하다. 내용과 형식이 마주 닿는다는 게 꼭 이와 같다. 치열하게 전진해 얻은 땅이 모두 내 영토가 되는 운수 좋은 때가 <훔볼트 USA>가 딛고 선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있다.
영화가 다루는 이야기가 여럿이다. 간단히 기억나는 것만 헤아려도 ▲뉴욕주 버펄로(Buffalo)에서 '켄싱턴 고속도로 덮개 및 터널 프로젝트(Kensington Expressway Cap and Tunnel Project)'에 반대하는 사람들 ▲오지에서 산양의 생태 복원을 연구하는 이들 ▲자연 관찰과 복원에 AI의 관점을 적용하기 위해 AI학습을 진행하는 연구자들 ▲오래 묵은 나무들이 자라는 숲에서 유튜브 영상을 찍는 사람 등 다양한 이들이 등장한다. 이들이 각각의 상황과 관심에 따라 당면한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이 처음엔 다소 어수선하게 느껴진다.
세상 무엇도 홀로는 존재할 수 없다
횡으로 공간을 옮겨가며 다양한 이들의 서로 다른 과업을 담는 영화는, 종으로는 지난 시대 훔볼트의 흔적을 좇는다. 특히 그가 미국을 방문하고 남긴 기록, 그 안에서 엿볼 수 있는 삶의 궤적과 사상이 영화를 종으로 꿰어낸다. 지구상 모든 존재가 외따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 연결돼 있다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해, 서로 다른 존재가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사유하며, 인간과 국가, 문명의 책임이며 정의와 평등의 가치로까지 뻗쳐나가는 사상의 단면을 읽어낼 수 있는 문장이 영화 가운데 자리한다.
영화는 훔볼트의 문장을 단서로 붙들고서 그의 이름이 붙은 미국의 여러 흔적들을 밟아나간다. 다큐는 자연스레 그 흔적들 위에 자리한 인간들을 비추는데, 서로 다른 듯한 이들의 삶이 마치 훔볼트가 생태계 안에서 그 연결성을 관측해낸 것과 같이 묘한 연결 속에서 상호작용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과연 세상엔 어떠한 사실도 홀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자연에 가까워질수록 인간의 영혼은 조화와 평안을 얻는다는 훔볼트의 인식은 이 시대에 어떻게 반영되고, 또 훼손되고 있을까. 누군가는 복원하고 나아가려 하고, 다른 누구는 부수고 역향하려 든다. 1조 원이 넘게 드는 켄싱턴 고속도로 터널화 프로젝트는 어떤 결과로 이어질까. 이 도로가 지역 주민들의 공동체를 해치고 기존 교통망을 훼손하며 공해를 발생시킨다는 인식은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교통량을 처리할 수 있다는 판단과 어떻게 맞붙는가. 그저 도로 하나를 두고 펼쳐지는 갈등이 국가와 민주주의, 공동체, 나아가 나무와 숲의 보존, 멸종위기 동물과 기후붕괴 등과 연결되는 순간은 지적 탄성을 자아낸다.
1초 출연, 아메리칸 바이슨의 이야기
영화 가운데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 카지노 내부 광고판에서 잠시잠깐 등장하는 아메리칸 바이슨, 즉 미국 들소의 이미지가 있다. 1초 내외의 짧은 등장은 이 영화가 폭발하는 그 실험적 연출 뒤에 이어진 의외의 영상인데, 혹자는 이를 두고 그저 영화가 다루는 주요한 이야기와 별다른 접점이 없는 화면이라고 지나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수많은 상징이며 절묘한 인용과 마찬가지로 이 또한 1초로 1만 글자의 이야기를 펼쳐내는 효과적 장치로써 기능한다. 요컨대, 훔볼트 식으로 표현하자면 비열한 인간과 문명이 자연을 경시해 빚은 비극의 노출이다.
미국 들소는 지역적 멸종상태다. 한때 수십만 마리를 헤아렸던 들소는 19세기에 이르러 제노사이드에 비할 만한 학살을 당한다. 처음엔 고기와 가죽을 얻기 위해서였고, 나중엔 서부개척시대를 맞아 철도를 놓고 농장을 개간하는 데 방해가 되어서였으며, 또 나중에는 아메리칸 원주민의 생계수단을 없애 이들을 지역에서 몰아내기 위해서 죽임을 당한다.
특히 우두머리 개체가 먼저 죽으면 주변을 빙빙돌며 혼란상태에 빠지는 습성을 이용해 단 몇 명의 사냥꾼이 수백, 수천 마리까지 사냥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필요한 가죽만 벗기고 고기가 그대로 썩도록 하여 너른 들판에서 수천 마리 들소가 썩어가는 끔찍한 광경이 잇따랐다는 묘사도 적잖다. 무차별적인 사냥으로 네바다주 전체에서 들소가 단 한 마리도 남지 않았는데, 사막 위에 향락의 도시 라스베이거스를 건설하고 번영에 이른 오늘의 자본주의를 훔볼트와 같은 현자가 본다면 들소 멸종의 원흉이라 손가락질 할지 모를 일이다(관련기사: 그 많던 소떼는 누가 다 죽였을까 https://omn.kr/2c59x).
<훔볼트 USA>는 탁월한 영화다. 지적으로는 막힌 회로를 뚫고 사유를 확장하는 탁월함이 있고, 보는 이를 감각적으로 일깨우고 도덕적으로 고양케 하는 순간 또한 없지 않다. 하고픈 말을 저 편한 대로 늘어놓는 흔한 다큐멘터리 창작자의 자세를 혁파하고 관객을 진동케 하기 위한 장치를 고안하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도전적이며, 그중 많은 도전을 성취로까지 이어낸다. 매체가 닿을 수 있는 가장 먼 표적을 겨냥한 야심은 또한 훔볼트의 그것과 닮아 있다. 나는 감독이 <훔볼트 USA> 가운데 진심으로 훔볼트를 좇았음을 알겠다. 어떤 탁월함은 마주한 이를 격동케 한다. 훔볼트를 안 찰스 다윈이 그러했듯이, 이 영화 또한 다른 누구에게 그러할 것을 안다. 내게도 그러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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