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약
거울 앞에 서서 빨간 넥타이를 고쳐맨다. 34년 동안 내 손은 분필 가루와 실습장의 기름때에 젖어 있었다. 기계와 전선을 만지는 일이 분필을 잡는 일보다 익숙했다. 그런 나에게 양복은 여전히 맞지 않는 옷이다. 빌려 입은 아버지의 양복처럼 겉돈다. 바쁜 일정을 소화하느라 미용실 갈 시간을 놓쳐 희끗하게 올라온 흰머리가 거울 속에서 나를 비춘다. 11일은 내가 교장으로 있는 서울로봇고등학교 2027학년도 신입생 모집을 위한 첫 입학설명회 날이다. 마이크를 잡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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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앞에 서서 빨간 넥타이를 고쳐맨다. 34년 동안 내 손은 분필 가루와 실습장의 기름때에 젖어 있었다. 기계와 전선을 만지는 일이 분필을 잡는 일보다 익숙했다. 그런 나에게 양복은 여전히 맞지 않는 옷이다. 빌려 입은 아버지의 양복처럼 겉돈다. 바쁜 일정을 소화하느라 미용실 갈 시간을 놓쳐 희끗하게 올라온 흰머리가 거울 속에서 나를 비춘다.
11일은 내가 교장으로 있는 서울로봇고등학교 2027학년도 신입생 모집을 위한 첫 입학설명회 날이다. 마이크를 잡으면 말이 길어지는 직업적 관성을 버리고, 오늘은 오직 5분간의 짧은 인사말 속에 우리 학교가 지향하는 '관계의 온기'만을 담으리라 다짐한다.
어제까지 오락가락하던 비가 그쳐 다행이다. 습도는 높지만, 전국 각지에서 부푼 기대를 안고 달려올 학생과 학부모들의 발걸음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졌기를 안도해 본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입학설명회를 준비하며 밤늦게까지 자료를 준비하고 시설을 점검하던 선생님들, 주차 공간을 기꺼이 양보해 준 동료들의 모습에서 나는 이미 '함께 비를 맞는' 연대의 마음을 읽는다. 500여 명의 귀한 손님을 맞는 이 자리는 단순히 학교를 알리는 행사가 아니라, 우리 교육 공동체의 진솔한 모습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신뢰의 장이어야 한다.
학교라는 숲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 사이에 있다
AD 학교는 건물이 아니라 그 안을 채우는 사람들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 우리 학교가 지난해 학교 평가에서 '매우 우수'를 받고, 학부모 민원이 거의 없는 기록을 세운 비결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학교가 정보를 독점하지 않고 유리벽처럼 투명하게 공유하며, 학부모가 '감시자'가 아닌 '동반자'로 거듭난 신뢰의 결실이다.
흔히들 '입력(Input)이 부실하면 출력(Output)도 빈약하다'는 말을 한다. 나는 교육의 본질이 좋은 재료를 선별하는 경쟁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리 훌륭한 재료라도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깊은 맛을 낼 수 없듯, 다양한 개성을 가진 아이들이 서로의 부족함을 보완하며 깊은 맛을 내는 과정이야말로 우리 학교가 가진 진짜 레시피이다.
설명회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100여 명의 재학생과 졸업생, 학부모들은 바로 그 조화가 맺은 현장이다. 교사의 백 마디 설명보다 더 정확한 것은 재학생의 생생한 학교생활 이야기고, 졸업생이 들려주는 취업 현장의 목소리이며, 학부모가 전하는 신뢰의 경험이다.
최근 반도체, AI, 로봇 분야 마이스터고를 향한 열풍이 거세다. 우리 학교 입학설명회를 취재하는 기자에게서 다시 한번 확인한다. 나는 오늘 찾아온 아이들에게 묻고 싶다. 세상의 유행이라는 '파도'에 무작정 몸을 싣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거친 파도 속에서도 바위에 딱 붙어 자리를 지켜내는 '따개비' 같은 아이들의 삶을 생각한다.
시대의 파도가 아닌 자신만의 지도를 그리는 법
아이들이 단순히 기능인이 되기 위해 이곳에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술이 누군가의 삶을 어떻게 바꿀지 고민하는 '지혜로운 주인'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시대의 파도를 타는 기술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자신만의 가치를 쌓아 올리는 일이다. 그림을 두텁게 덧칠하는 '임파스토' 기법처럼 아이들의 손끝에 밴 고뇌가 각자의 고유한 문양이 되어 자기 삶의 서사를 두껍게 만들어가길 바란다.
고교 선택이라는 중대한 갈림길에서 오늘 내가 입은 어색한 양복처럼 '남의 눈에만 좋아 보이는 옷'을 억지로 껴입지 않기를 바란다. 인생은 남이 그려준 지도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지도를 그려가는 탐험이다.
한 번의 설명회로 모든 것을 결정하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 학교뿐 아니라 다른 학교의 설명회도 두루 다니며 부모님과 충분히 대화하기를 권한다. 아이가 어떤 길을 택하든, 흔들리면서도 스스로 길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곁에서 지켜봐 주는 등대의 마음이 필요한 때다.
설명회가 시작되기 전, 다시 한번 거울을 본다. 여전히 어색한 양복 차림이지만, 이 옷이 주는 무게감은 곧 아이들의 미래라는 밧줄을 끝까지 놓지 않겠다는 책임감임을 안다. 아이들이 훗날 우리 학교라는 옷을 입었을 때,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당당한 자신의 모습이 될 수 있도록, 나는 오늘도 실습장의 거친 손길을 양복 소매 아래 감추고 웃으며 그들을 마중 나간다. 넥타이를 고쳐매던 어색한 손끝이, 아이 하나하나의 손을 맞잡는 순간만큼은 다시 단단해진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사 채택 후 개인블로그에도 실립니다.
#입학설명회#마이스터고#서울로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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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탈자 신고 네이버 채널구독 다음 채널구독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10만인클럽 10만인클럽 회원글 오성훈 (garachim67) 내방
서울로봇고등학교 교장. 『되풀이되는 비극, 따개비 현장실습』, 『디지털 대전환 시대 직업계고 미래는』 등 직업계고 학생들의 삶과 미래를 응원하는 글을 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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