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약
인공지능(AI)의 급격한 팽창과 이로 인한 전력 수요 폭증이 글로벌 화두로 떠오른 지 오래다. 안정적인 전력 공급, 탄소 중립, 그리고 에너지 안보라는 세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이른바 '원자력 르네상스'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원전의 안전성을 둘러싼 찬반 여론은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팽팽하며,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분 등 오랜 난제들도 그대로 산적해 있다. 이재명 정부 역시 집권 초기부터 소형모듈원전(SMR), 한미 원자력 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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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AI)의 급격한 팽창과 이로 인한 전력 수요 폭증이 글로벌 화두로 떠오른 지 오래다. 안정적인 전력 공급, 탄소 중립, 그리고 에너지 안보라는 세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이른바 '원자력 르네상스'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원전의 안전성을 둘러싼 찬반 여론은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팽팽하며,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분 등 오랜 난제들도 그대로 산적해 있다. 이재명 정부 역시 집권 초기부터 소형모듈원전(SMR), 한미 원자력 협정, 핵추진 잠수함 등 굵직한 관련 주제들을 던지면서도, 원자력 발전의 지속적인 확대 여부에 대해서는 즉답을 피한 채 신중하게 거리를 유지하는 모양새다.
원자력과 관련된 정치적 의제들과 산업계의 동향은 연일 언론을 장식하고 있지만, 정작 작년부터 본격화된 미국 원자력 규제 체계의 대대적인 재편 흐름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미미하다. 이에 본 글에서는 2025년 트럼프 정부의 행정명령(Executive Order; EO)으로 촉발된 미국의 원자력 규제 완화 추세를 짚어보고 향후 우리 원자력 정책에 미칠 파장을 전망해보고자 한다.
트럼프 행정부의 '원자력규제위원회 개혁 명령(EO 14300)'
AD 2025년 5월 23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미국의 원자력 산업 중흥을 위한" 네 건의 행정명령을 연달아 발표했다. 각각의 제목은 '국가 안보를 위한 선진 원자로 기술 배치(EO 14299)', '원자력규제위원회 개혁 명령(EO 14300)', '에너지부의 원자로 검증 개혁(EO 14301)', 그리고 '원자력 산업 기반 재활성화(EO 14302)'이다. 이 중에서도 EO 14300은 미국의 원자력 규제 주무부처로서 모든 시설의 인허가를 주관하는 원자력규제위원회(Nuclear Regulatory Commission; NRC)를 직접 겨냥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EO 14300은 서두에서부터 "민간 원자력 기술의 신속하고 효율적인 배치"를 NRC의 공식 미션으로 명시했다. 규제기관이 원자력 산업 진흥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더 나아가 적극적인 조력자가 되도록 하겠다는 목표를 공공연하게 드러낸 것이다. 미국의 원자력 발전 용량을 현재의 4배인 400 기가와트(GW)로 확대하겠다는 국가적 목표를 제시하며, NRC는 이를 적극 뒷받침하는 조직이 되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EO 14300에는 원자력 산업계의 민원사항이 충실하게 반영된 것처럼 보인다. 인허가 심사 업무가 장기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기한을 도입하여, 신규 원전의 건설 및 운영허가는 18개월, 기존 원전의 수명 연장은 12개월, 환경영향평가 등 기타 심사는 6개월 이내에 완료하도록 명시했다. SMR과 초소형 원자로, 차세대 원자로 등의 인허가를 위한 패스트트랙은 별도로 마련될 예정이다. 그리고 미 에너지부나 국방부 등 다른 정부 부처에서 검증을 마친 원자로에 대해서는 NRC의 심사를 과감히 생략할 수 있도록 했다.
트럼프에 의해 올해 1월 새로 임명된 호 니에 위원장의 태도는 사뭇 당당하다. 그는 "EO 14300은 하나의 기폭제"였다고 평하며, NRC는 "지난 50년간 이어져온 규제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재편하고 있다"고 밝혔다. 올해 3월 테라파워(TerraPower)의 비경수형 원자로가 NRC의 건설허가를 취득한 것은, 이 전면전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신임 위원장에게는 기념비적인 성과였다.
그러나 NRC 내부에서 현 상황에 대한 불만과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새롭고 과감한 설계를 채택한 차세대 원자로 등에 대한 심사 요청이 줄지을 것으로 예상되는 데다가 심사 기한에 대한 압박 또한 점차 강해지고 있는데, 심사를 수행할 전문 인력부터가 부족한 상태라는 것이다. '우려하는 과학자 모임(Union of Concerned Scientists)'이나 '원자과학자회보(Bulletin of Atomic Scientists)'의 비판적 성명도 이어지고 있다. 독립적 규제기관으로 역할을 해야 할 NRC를 정권의 거수기로 전락시키는 과정이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방사선 안전 기준 전면 재검토
또 하나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방사선 안전 기준을 전면 재검토하도록 지시한 내용이었다. EO 14300은 수십 년간 국제적 표준이었던 LNT(LinearNo-Threshold; 선형 무역치) 모델과 ALARA(As Low As Reasonably Achievable; 합리적으로 달성 가능한 한 가장 낮게) 원칙을 사실상 폐기 수순으로 밀어 넣었다. 백악관은 이러한 보수적 규제 장치들이야 말로 자연방사선 수준의 무해한 리스크에까지 과도하게 적용되어 원자력 발전의 비용을 천문학적으로 높여온 주범이라고 규정했다.
LNT 모델은 "아무리 적은 양의 방사선이라도 피폭량에 비례해 암 발생 등 인체 위해성이 선형적으로 증가한다"는 가정이다. 현시점의 과학 수준으로는 인과관계를 완벽히 규명할 수 없는 저선량 구간이 존재하므로, 공공 보건을 위해 가급적 가장 신중하고 보수적인 태도를 유지하자는 과학계의 '사전주의적 합의'이다. 이 LNT 모델에 기반하되, 경제적·사회적 요인을 고려해 피폭량을 '합리적으로 가능한 한 낮게' 규제하자는 융통성이 바로 ALARA 원칙이다. 원자력 노동자와 인근 주민, 나아가 일반 대중을 보호하는 방사선 안전 기준은 모두 이 두 축 위에 설계되어 있다.
그러나 EO 14300은 '구시대적인' LNT 모델을 폐기하고 '확정적이고 과학에 기반한 기준'을 도입할 것을 주장한다. 이는 "일정 수준 이하의 방사선 피폭은 무해하니 규제 기준을 완화하라"는 말을 그럴듯한 수사로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LNT 모델에 대한 원전 산업계와 일부 학계의 공격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이들은 저선량 방사선이 무해하거나 심지어 인체에 유익하다는 주장을 펼치며, LNT 모델이 역학 및 실험 데이터가 부족했던 과거에 만들어진 낡은 기준이라 비판해 왔다.
하지만 NRC의 입장은 완강했다. 2021년에도 NRC는 LNT 모델을 폐기해야 한다는 청원을 기각하며, "방사선 피폭의 무해함을 주장하는 연구들은 현행 모델을 뒤집기엔 그 근거가 현저히 부족하다"고 결론 내린 바 있다. 과학계가 합의한 내용에 변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백악관이 LNT 모델을 다시 도마 위에 올린 것은, 결국 산업계의 비용 절감을 위해 안전 기준을 강제로라도 끌어내리겠다는 노골적인 압박이다.
우리가 마주한 진짜 숙제
트럼프의 이번 행정명령을 그간 그가 보여준 수많은 일탈적 행보 중 하나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일탈이 대개 그러했듯, 이번 조치 역시 산업계의 오랜 숙원을 행정부가 가장 노골적이고 거친 방식으로 대변해 준 것에 가깝다고 봐야한다. 그러므로 미국 원자력 규제의 급격한 전환은 향후 정권 교체 여부와 무관하게 당분간 지속될 공산이 크다.
문제는 미국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시선이다. 현재 국내 언론들은 트럼프의 행정명령과 NRC 재편 작업 등을 오로지 "SMR 시장 선점을 위한 규제 효율화"라는 산업적·경제적 관점으로만 해석하고 있다. 규제기관의 독립성이 산업계와 행정부의 압력에 의해 훼손되고, 엄연한 국제 과학계의 합의가 비용 절감을 위해 전복될 위기에 처한 현 상황의 심각성을 경고하는 목소리는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미국의 과감한 전환을 본받아 우리도 원자력 규제 '혁신'을 통해 "SMR 속도전"에 동참해야 한다는 훈수만 연일 이어지고 있다.
미국에서 시작된 변화의 흐름은 이미 우리 눈앞에 도달해 있다. NRC의 규제 '효율화' 결과물이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국내 원자력 산업계는 기다렸다는 듯 "우리 법령과 안전 기준도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게 개정하라"며 정부를 강하게 압박할 것이다. 정치가 과학을 집어삼키고 있는 미국의 위험한 질주를 맹목적으로 수용할 것인가, 아니면 미국과의 동조화를 멈추고 공공적 관점에서 원자력 규제를 다시 고민할 것인가, 여전히 SMR 속도전만을 외치는 목소리들 속에서 우리가 마주한 진짜 숙제는 여기에 있다.
#미국#원자력#규제완화#EO1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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